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8세 (문단 편집) === 이혼과 [[잉글랜드]] [[종교 개혁]] === 헨리 8세의 이혼과 종교개혁의 원인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.[* 자세히 설명하자면 당시 유럽은 <[[살리카 법]]>에 의하여 여성이나 여계 후손은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는데, 헨리 8세는 [[아라곤의 캐서린]]과의 사이에서 3남 3녀를 얻었지만 훗날 [[메리 1세]]가 되는 딸 하나만 남고 일찍 잃었다. 거기다 정부가 낳은 자식은 서자일 뿐 후계자가 되지 못해서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서 무조건 아들을 보아야 했다. 그러나 이미 당시 헨리 8세가 40세를 넘겼고, 그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인 캐서린도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기 힘들자 헨리는 새로운 왕비를 들여 아들을 보려 했던 것이다. 하지만 문제는 캐서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었고, 헨리의 무관심과 바람기도 참아줄 만큼 남편에게 헌신한 왕비였는데 그녀를 왕비 자리에서 폐위한 것이었다.] 마침 헨리 8세 치세에는 [[종교개혁]] 열풍이 대륙에서 불고 있었는데, 헨리는 [[마르틴 루터]]가 종교개혁 시기 발표한 논문에 대한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기도 하는 등 [[가톨릭]] 신앙을 유지하며 [[교황]]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.[* 사실 논문은 잉글랜드 [[주교]]들이 쓴 것을 헨리 8세의 명의로 발표한 것이었다. 당시 풍속에선 발표자의 명의가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중요했기에 흔한 일이었다.] 이 공로로 1521년 8월에 헨리 8세는 [[레오 10세]]로부터 '''신앙의 수호자'''(Fidei Defensor)[* 영어로 'Defender of Faith']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았다.[* 그리고 이 'Fidei Defensor'라는 칭호는 현재 [[찰스 3세]]에 이르기까지도 영국 국왕의 공식 타이틀로 유지되고 있다.] 훗날 헨리 8세가 [[성공회|잉글랜드 국교회]]를 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해 보일 수도 있다. 그런데 헨리 8세의 <수장령> 선포와 일련의 종교개혁 조치는 사실 교리, 교회 조직, [[7성사]]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